김남길, 감귤봉진, 1703년, 지본채색, 세로 56.7㎝, 가로 36㎝,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소장.
조천~서귀~모슬~애월 21일 여정 담아… 군사조련·활쏘기 시험·양로연 등 생생한 모습 고스란히 그리고 성산 해돋이 구경·김녕 용암굴 체험·산방굴 술자리 등도… 당시 지리 상세한 묘사로 육지 사람에게 정보 제공했다.
■ 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조선시대 관료들은 자신의 관직 이력을 다양한 형태의 기록으로 남겼다. 매일의 공무를 일기로 정리하기도 하고, 인근 명승을 탐방한 뒤 그곳의 경관을 실경산수화로 그려 과거를 기억하려 했으며, 자신이 이룬 치적을 사실적인 기록화로도 제작했다. 경관직보다는 대부분 지방의 외관직으로 나갔을 때의 기록이 많은 편인데, 이는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 관직 발령이 아니면 가보기 어려운 새로운 환경에서 일했던 자취를 스스로 기념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2 김남길, 성산관일, 1703년, 지본채색, 세로 56.7㎝, 가로 36㎝,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소장.
지방관 중에서도 바다 건너 중앙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의 최고 통치권자로 부임하는 것은 매우 남다른 경험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특별한 이력을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라는 40폭 그림으로 남긴 사람은 18세기 초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를 지낸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다.
순력은 매년 봄과 가을에 관찰사가 직접 도내의 각 고을을 돌며 방어 실태와 군민(軍民)의 풍속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제주목사는 전라도 관찰사를 대신해서 순력의 권한을 부여받았고 순력 마지막에는 제주목·대정현·정의현 관리의 성적을 심사하는 특권도 가졌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사의 순력 과정과 재임 시 이룬 치적을 주제로 한 환력도(宦歷圖)이면서도 제주의 자연경관과 문물을 고스란히 시각적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끈다. 게다가 이형상은 제주 지역의 화공 김남길(金南吉)에게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서문에 언급함으로써 제작 화가를 확실하게 명시하였다. 또 서문의 글씨를 쓴 사람은 당시 제주 대정현 감산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오시복(吳始復, 1637~1716)임이 두 사람의 편지글에서 확인되어 화첩의 가치가 더해졌다.
‘탐라순력도’의 주인 이형상은 1702년 3월부터 약 15개월간 제주목사를 지냈다. 순력은 1702년 10월 29일 화북을 출발하여 시계 방향을 따라 조천, 별방, 수산, 정의, 서귀, 대정, 모슬, 차귀, 명월, 애월을 거쳐 제주목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21일간의 여정이었다. 그림은 제주목사의 담당 구역을 한눈에 보여주는 제주 지도 ‘한라장촉(漢拏壯囑)’을 시작으로 군사 조련, 마필 점검, 활쏘기 시험, 양로연, 관리들의 근무성적 평가 등 순력의 공식적인 업무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 외에도 순력 기간 전후의 인상적인 활동이 포함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각 장면은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40폭 그림 중에 몇 장면을 살펴보자면, 먼저 제주목사만의 고유 업무인 감귤 진상을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그린 ‘감귤봉진(柑橘封進)’(그림 1)이 눈에 들어온다. 이형상은 화면 왼편의 연희각에 앉아 진상할 감귤을 최종 점검하고 마당에서는 여인들이 감귤을 선별하여 이파리와 함께 소쿠리에 담아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운반에 쓸 감귤 상자를 만드는 목공 작업이 한창이며 그 곁에는 포장에 쓸 감귤 이파리와 볏짚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이때의 진상 내역은 화면 하단에 쓰여 있는데, 지금은 이름도 낯설고 시중에서도 사라진 제주의 재래 감귤류가 9종 4만42개에 달했고, 그 외에 치자 112근과 감귤껍질 78근도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형상은 감귤 진상과 한 해의 수확을 마무리하고 관아 후원에 있는 감귤 과수원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그 모습은 ‘귤림풍악(橘林風樂)’에 담겨 있다. 만발한 꽃을 대신해서 노란색 과실이 주렁주렁 달린 감귤나무 사이에서 즐기는 연회는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을 만큼 이형상에게 환상적이면서도 색다른 경험이었음이 분명하다.
3 김남길, 건포배은, 1703년, 지본채색, 세로 56.7㎝, 가로 36㎝,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소장.
이형상은 ‘탐라순력도’에 순력 여정 중에 탐방했던 제주의 명승도 여럿 포함시켰다.
성산에서 해돋이 구경, 김녕의 용암굴 체험, 정방연에서 풍악 감상, 천지연·천제연 폭포에서 활쏘기, 산방굴에서 작은 술자리, 취병담에서 뱃놀이 등 여유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다. 이는 제주 특유의 자연경관을 묘사한 실경산수화로서도 의미가 크다. 그중에서 ‘성산관일(城山觀日)’(그림 2)은 이형상이 성산에서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원통형의 단순한 실루엣을 가진 성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각교(刻橋)’를 지나 나무를 걸어 만든 사닥다리를 올라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성곽 안쪽에는 ‘진해당(鎭海堂)’ 옛터가 표시되어 있고 빗물이 고여 이루어진 ‘봉천수(奉天水)’ 옆에는 물을 먹기 위해 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성산에서 연결된 해안에는 성산과 우도(牛島)가 모두 바라보인다는 ‘바위오름(食山岳)’과 ‘오조연대(五照煙臺)’가 표현되었고 화면 왼쪽 아래에는 ‘우도(牛島)’와 ‘죽도(竹島)’도 그려져 있다. 바위오름에 올라가면 성산과 우도가 모두 바라보인다고 하는데, 이처럼 ‘탐라순력도’에는 자연적, 인문적 지리 정보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고 그림의 주제가 잘 부각되도록 화면이 구성되었다.
‘탐라순력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이형상이 부임 기간 중 이룩한 치적을 담은 ‘건포배은(巾浦拜恩)’(그림 3)이다. 도내의 신당과 사찰을 모두 철폐하고 무당은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제주 사람들을 유교적으로 교화했던 사실을 그린 것이다. 화면에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고 있는 신당들이 보이고 제주목 관아에서 이형상을 향해 절을 올리거나 포구로 나와 한양 쪽을 향해 왕의 은혜에 감사의 예를 올리는 사람들이 가득 그려져 있다.
한편 ‘탐라순력도’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 화첩의 제작 배경에 숨어 있는 중요한 인물이 한 명 있는데 바로 서문의 글씨를 써준 오시복이다.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한 이형상과 오시복의 애틋한 관계는 40폭 그림과는 별도로 화첩 완성 이후에 추가된 ‘호연금서(浩然琴書)’(그림 4)가 증명한다. 호연은 이형상이 경북 영천에 1701년 무렵 마련해 둔 정사의 이름이기도 하며 그는 관직에서 물러날 때마다 이곳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남인에 속한 오시복은 1701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모해한 사실이 발단이 된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어 있었다. 이형상은 뜻하지 않게 제주에서 만나게 된 오시복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때로는 조언을 구하기도 하며 깊이 교유했다. 이형상은 사냥에서 획득한 동물을 보내기도 하고 순력 중에 대정현을 지날 때는 오시복의 처소를 방문하여 이삼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형상이 제주목사에서 파직된 것도 바로 오시복을 옹호하는 상주를 올린 것이 숙종을 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존경과 신뢰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오시복이 자신이 아끼던 거문고에 명문을 새겨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제주를 떠나는 이형상에게 선사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형상이 호연정을 향해 제주를 떠날 때 제일 먼저 챙긴 물건도 오시복이 선사한 거문고였다고 한다. ‘호연금서’에서, 대기치가 펄럭이는 큰 배에 탄 이형상이 끌어안고 있는 것도 바로 두 사람의 관계를 말해주는 징표인 거문고이다. ‘호연금서’는 제주 사람들과 오시복이 제주를 떠난 이형상에게 작별의 아쉬움을 담아 그려 보낸 일종의 전별도(餞別圖)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4 김남길, 호연금서, 1703년, 지본채색, 세로 56.7㎝, 가로 36㎝,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소장.
오시복은 제주에서의 경험을 그림으로 남길 것을 이형상에게 제안하기도 했지만, ‘탐라순력도’의 제작은 이형상의 박학적이고 실학적인 학문 경향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남인계 실학자다운 면모는 일찍이 1694년부터 2년간 강화도에 들어가 살 때 지리지 성격의 ‘강도지(江都志)’를 완성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지리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그는 쉽게 갈 수 없는, 육지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의 제주 섬을 한 바퀴 돌며 자신의 체험을 꼼꼼하게 시각화할 필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나중에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개인적인 기념물이자 와유(臥遊)의 자료로 삼고자 했으며, 제주를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으로 보는 지리지 역할을 제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탐라순력도’의 그림은 중앙의 도화서 화원이나 훈련받은 직업화가만큼 세련되거나 능란한 묘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제주를 잘 아는 지역 화가의 세밀한 필치로 재현된 제주의 구석구석은 작은 지형지물에까지 묵서(墨書)된 명칭과 함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기록화의 경우 고정관념에 갇혀 정형화된 묘사가 반복되기 쉽지만, ‘탐라순력도’에서는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변형이나 왜곡은 최소한에 머물러 있다. 예컨대 제주목사의 존재는 화면 맨 구석에서 발견되기도 하며 심지어 뒷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화가 김남길에게는 주인공이나 지체가 높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구도보다는 제주의 자연과 행사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해안가 파도의 흰 포말이나 대숲의 특이한 형태는 다른 그림에서 볼 수 없는 김남길의 개성적 표현이며, 해녀복을 입고 물질하는 해녀의 표현 등은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래서 ‘탐라순력도’에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18세기 초 제주의 실태보고서’라고 붙여진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다.
■ 이형상
이형상은 28세에 문과 급제 후 총 12년 동안 관직 생활을 했는데 그중에서 8년은 지방관으로 일했다. 그는 출세보다는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고, 평생에 걸쳐 142종 326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경학, 예학, 역사, 지리, 음악, 시문 등 폭넓은 저술의 범위는 그의 박물학적이고 실용적인 학문 경향을 말해준다. 이형상은 ‘탐라순력도’ 외에도 형의 사위인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부탁을 받아 1704년 제주 지방지 성격의 ‘남환박물(南宦博物)’을 완성했다. ‘남환박물’은 ‘탐라순력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로서 서로 보완이 된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